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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5. 사색 상실의 시대

 

고성 바다에 어느 까페에서

 

소크라테스의 '디아트리베'를 본받아 우리는 '앎'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지식의 이동을 '앎'으로 착각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영화를 보고 나온 한 친구는 "재밌네", "웃기다"라고 가볍게 느낌을 말할 뿐 누군가가 해석을 정리해 놓은 유튜브를 들여다보기 바쁘다. 정보는 하염없이 쏟아지지만 우리는 정보를 수령만 할 뿐, 그것을 정돈하는 것마저 아웃소싱하고 있다. 

 

이런 형태가 만연해지며 발견할 수 있는 또 한 가지 아쉬 점은 타인의 정보를 습득한 걸 마치 자기 정보인 듯 행동한다는 점이다. 한 번 배운 것을 습득으로 착각하면 깊이 있는 대화는 고산지대의 산소처럼 점점 희박해진다. 영상에서 떠드는 정보가 곧 '나의 고유한 생각'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린 정보가 쏟아지는 사회에서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반론하며 비판하고 논의하며 사색하고 침잠하는 능력을 점점 상실해 가고 있다. 바야흐로 '사색 상실의 시대'인 것이다.

 

인공지능이 출현함에 따라 앎의 정의는 점점 흐려지기 시작할 것이다. 텔레비전이 세상에 나왔을때는 그것을 바보상자라고 불렀다. 이제 정보의 경계는 거의 무너졌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가 삶을 통해 말했던 '너 자신을 알라' 는 6글자가 한없이 중요해진다. 이 말은 체화되지 않은 지식을 뽐내는 가짜 지성인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며, 삶으로 녹여낸 지식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말이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크라테스의 명언은 이런 의미를 전해준다. 

 

씹지 않고 음식을 삼키는 습관처럼 정보를 씹지 않고 삼키고 있으니 우린 마땅히 정보를 나의 것으로 소화하는데 시간을 투자해야하며, '나'라는 존재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투영하여 앞으로 '진짜 사색한 것'을 내 생각으로 여겨야 한다. 디아트리베를 통해 한 단계 높은 생각의 기준을 세우면 탁한 시야가 맑아지고 구렁텅이에 빠진 삶의 관점을 180도 바꿔줄 수 있다. 삶으로 녹여낸 지식, 우리는 이 경지를 새로운 '앎'으로 정의하여 모든 지식이 허공에 헛되이 버려지지 않도록 깊이 있는 사색으로 자신을 이끌어나가야 할 것이다. 

 

 

- 왜 당신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살고 있는가 中 한 챕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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